백두대간 사람들 10 오색- 오색에도 흔들바위가 있었네
작성일 18-08-2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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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강 조회 238,123회 댓글 0건본문
점봉산과 설악산을 가르는 한계령 잿빛 아스팔트길은 이리 꺾고 저리 돌며 고개 아래 첫 동네 오색을 비켜가고 있다. 지난 89년 미시령길이 확장되면서 자꾸 줄기만 하는 자동차들도 ‘관광 오색’의 명성을 회복하려는 안간힘에 곁눈 한번 주지 않고 바쁜 걸음을 더욱 재촉할 뿐이다.
오색은 거짓말처럼 한산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야 할 약수터에는 몇몇 사람들이 여유롭게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담고 있었다. 집단시설지구 50여곳의 식당 주인들은 빼곡이 열어둔 문에 기대어 혹시나 하는 기대로 어쩌다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제철에 문턱이 닳아야 할 온천장에는 ‘IMF 피해자 특별우대’라는 현수막만이 외롭게 걸려 있을 뿐이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오색에서 사라진 것은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다섯 가지색의 꽃을 피우는 나무뿐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계곡을 꼽을 때면 빠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주전골 기암과 봉우리들만 그대로일 뿐이다. 그나마도 이름은 바뀌었고 한여름 밤 세월의 강을 순식간에 건네주던 수많은 전설도 더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 전설 가운데는 하늘의 벌로 억겁의 세월 이별의 고통을 되풀이해야 하면서도 잔꾀를 부리려던 견우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전설은 이렇다. 7월7일, 직녀를 만날 채비를 하던 견우는 한가지 꾀를 내 하늘 닭을 찾아갔다. 견우는 이별의 고통을 어루만지기에 하룻밤은 너무 짧으니 제발 내일은 울지 말라는 부탁을 건네며 넌지시 전대를 풀렀다. 하늘 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물이 건네지자마자 하늘 닭과 견우 직녀의 몸은 굳어져 바위가 됐다는 거였다.
전설이 잊혀지면서 천계암은 지금도 약간의 힘만 가해도 되는 흔들바위로, 견우직녀암은 부부가 입을 맞추는 것 같다고 해서 부부암으로 불리고 있다. 은하수 계곡과 그 어딘가에 있다는 오작교는 아예 찾을 길이 없다.
오색약수터에서 선녀탕을 지나 용소폭포에 이르는 계곡을 지금은 주전골이라고 부르지만 주전골은 용소폭포에서 마주 보이는 계곡이고 원래는 은하수 계곡이라 부르지 않았나 추측해 볼 뿐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오색사람들은 다시 산을 꿈꾸고 있다. “자연휴식년제에 묶인 계곡과 등산로를 열어야 합니다. 망경대, 만상대, 여신폭포, 옥녀폭포…. 주전골의 경치는 금강산에 버금갑니다.” 남설악 구조대 장형춘(38) 부대장의 바람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오색에서 대청봉을 잇는 케이블카 설치계획이 마을을 들뜨게 한 적도 있었지만 개발에서 보전쪽으로 방향을 바꾼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오색리 아래 백암마을에서 국립공원구역 경계에 있는 관모산을 잇는 케이블카 설치계획이었지만 이 역시 실현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사업성이 없다며 어느 기업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탓이다.
“옛날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80년 개발되기 전 마을 한가운데 다북 소나무 아래에는 밤마다 멍석이 펼쳐졌지요. 수양객들과 마을 젊은이들이 둘러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며 전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때는 천막이라도 치고 장사라도 할 수 있었죠. 민박수입도 제법 됐구요.” 양양군 이장 가운데 가장 젊은 양범석(38) 이장은 이대로 가다간 마을 사람 전체가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판이라고 걱정한다. 지금의 오색에는 부칠 논 한 평도 옥수수 한 포기 심을 땅마저도 남아 있지 않다. 옛 마을터에는 여관들이 들어섰고 논과 밭은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뒤덮인 지 오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경쟁력을 유지하던 집단시설지구는 당장 재개발을 해야 할 만큼 낙후돼 있지만 대도시 도심에 버금갈 정도로 땅값이 오른 데다 그나마도 대부분 외지인 소유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70년대 신혼여행지로 명성을 떨치던 남설악호텔은 일찌감치 오색그린야드호텔에 바통을 넘긴 채 간판을 내렸다. 그러나 오색그린야드호텔마저 IMF를 맞아 구조조정의 태풍 속에서 인원을 절반 이상 줄인 채 사활을 건 살아남기를 시도하고 있다. 국내유일의 사학 교직원 휴양시설이지만 정부로부터 지원은커녕 사학연금관리공단의 구조조정을 위해 매각할 것을 종용받고 있다. 교직원 연수를 활성화하고 수학여행단을 유치하겠다는 호텔쪽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오색의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아직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지난 3월1일 오색은 지난해 경비가 없어 걸르고 넘어간 대보름 잔치를 열었다. 침체된 마을 분위기라도 살려보자는 거였다. 마을 노래자랑은 호텔의 연회장에서 치러졌다. 한때 탄산약수의 방출량 문제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을과 호텔 사이에 개선의 조짐이 보이는 것도 오색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탓이다.
흔들바위에 올랐던 남설악 구조대 장 부대장은 내려오는 길에 식수로 준비해 간 물을 바위의 소나무에 뿌렸다. 현재로선 주전골 빼어난 비경만이 관광객의 발길을 되돌릴 유일한 대안이다. 흔들바위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 사람들도 많이 찾고 국립공원관리공단도 등산로를 개설해 줄 것이 아니냐는 소박한 바람이다.
오색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올 겨울 공공근로사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들은 봄이 오면 지난해 처음 시작한 나물채취를 위해 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불법인 줄 알지만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산을 훼손한 것은 산에 기대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관광지로 개발한다고 삽을 들이댈 당시 땅을 내준 마을 사람들에게는 평당 1만원 안팎의 돈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 땅은 평당 30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그 차익을 다시 돌려줄 수는 없겠지만 이제 한가지 선택은 해야 한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등산로를 개설하든 나물채취를 허가해주든지…. 오색사람들에겐 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 보인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0-오색-오색에도-흔들바위가-있었네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오색은 거짓말처럼 한산했다. 사람들이 줄을 서야 할 약수터에는 몇몇 사람들이 여유롭게 커다란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담고 있었다. 집단시설지구 50여곳의 식당 주인들은 빼곡이 열어둔 문에 기대어 혹시나 하는 기대로 어쩌다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제철에 문턱이 닳아야 할 온천장에는 ‘IMF 피해자 특별우대’라는 현수막만이 외롭게 걸려 있을 뿐이다.
21세기를 코앞에 둔 오색에서 사라진 것은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다섯 가지색의 꽃을 피우는 나무뿐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계곡을 꼽을 때면 빠지지 않을 만큼 빼어난 주전골 기암과 봉우리들만 그대로일 뿐이다. 그나마도 이름은 바뀌었고 한여름 밤 세월의 강을 순식간에 건네주던 수많은 전설도 더이상 이야기되지 않는다. 그 전설 가운데는 하늘의 벌로 억겁의 세월 이별의 고통을 되풀이해야 하면서도 잔꾀를 부리려던 견우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전설은 이렇다. 7월7일, 직녀를 만날 채비를 하던 견우는 한가지 꾀를 내 하늘 닭을 찾아갔다. 견우는 이별의 고통을 어루만지기에 하룻밤은 너무 짧으니 제발 내일은 울지 말라는 부탁을 건네며 넌지시 전대를 풀렀다. 하늘 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뇌물이 건네지자마자 하늘 닭과 견우 직녀의 몸은 굳어져 바위가 됐다는 거였다.
전설이 잊혀지면서 천계암은 지금도 약간의 힘만 가해도 되는 흔들바위로, 견우직녀암은 부부가 입을 맞추는 것 같다고 해서 부부암으로 불리고 있다. 은하수 계곡과 그 어딘가에 있다는 오작교는 아예 찾을 길이 없다.
오색약수터에서 선녀탕을 지나 용소폭포에 이르는 계곡을 지금은 주전골이라고 부르지만 주전골은 용소폭포에서 마주 보이는 계곡이고 원래는 은하수 계곡이라 부르지 않았나 추측해 볼 뿐이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줄어들면서 오색사람들은 다시 산을 꿈꾸고 있다. “자연휴식년제에 묶인 계곡과 등산로를 열어야 합니다. 망경대, 만상대, 여신폭포, 옥녀폭포…. 주전골의 경치는 금강산에 버금갑니다.” 남설악 구조대 장형춘(38) 부대장의 바람은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오색에서 대청봉을 잇는 케이블카 설치계획이 마을을 들뜨게 한 적도 있었지만 개발에서 보전쪽으로 방향을 바꾼 국립공원관리공단을 설득할 수는 없었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오색리 아래 백암마을에서 국립공원구역 경계에 있는 관모산을 잇는 케이블카 설치계획이었지만 이 역시 실현되기는 힘들어 보인다. 사업성이 없다며 어느 기업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탓이다.
“옛날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80년 개발되기 전 마을 한가운데 다북 소나무 아래에는 밤마다 멍석이 펼쳐졌지요. 수양객들과 마을 젊은이들이 둘러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며 전설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때는 천막이라도 치고 장사라도 할 수 있었죠. 민박수입도 제법 됐구요.” 양양군 이장 가운데 가장 젊은 양범석(38) 이장은 이대로 가다간 마을 사람 전체가 생활보호대상자가 될 판이라고 걱정한다. 지금의 오색에는 부칠 논 한 평도 옥수수 한 포기 심을 땅마저도 남아 있지 않다. 옛 마을터에는 여관들이 들어섰고 논과 밭은 아스팔트와 시멘트에 뒤덮인 지 오래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경쟁력을 유지하던 집단시설지구는 당장 재개발을 해야 할 만큼 낙후돼 있지만 대도시 도심에 버금갈 정도로 땅값이 오른 데다 그나마도 대부분 외지인 소유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70년대 신혼여행지로 명성을 떨치던 남설악호텔은 일찌감치 오색그린야드호텔에 바통을 넘긴 채 간판을 내렸다. 그러나 오색그린야드호텔마저 IMF를 맞아 구조조정의 태풍 속에서 인원을 절반 이상 줄인 채 사활을 건 살아남기를 시도하고 있다. 국내유일의 사학 교직원 휴양시설이지만 정부로부터 지원은커녕 사학연금관리공단의 구조조정을 위해 매각할 것을 종용받고 있다. 교직원 연수를 활성화하고 수학여행단을 유치하겠다는 호텔쪽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오색의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아직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지난 3월1일 오색은 지난해 경비가 없어 걸르고 넘어간 대보름 잔치를 열었다. 침체된 마을 분위기라도 살려보자는 거였다. 마을 노래자랑은 호텔의 연회장에서 치러졌다. 한때 탄산약수의 방출량 문제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마을과 호텔 사이에 개선의 조짐이 보이는 것도 오색의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 탓이다.
흔들바위에 올랐던 남설악 구조대 장 부대장은 내려오는 길에 식수로 준비해 간 물을 바위의 소나무에 뿌렸다. 현재로선 주전골 빼어난 비경만이 관광객의 발길을 되돌릴 유일한 대안이다. 흔들바위의 명성이 널리 퍼지면 사람들도 많이 찾고 국립공원관리공단도 등산로를 개설해 줄 것이 아니냐는 소박한 바람이다.
오색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올 겨울 공공근로사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들은 봄이 오면 지난해 처음 시작한 나물채취를 위해 산으로 들어갈 것이다. “불법인 줄 알지만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산을 훼손한 것은 산에 기대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관광지로 개발한다고 삽을 들이댈 당시 땅을 내준 마을 사람들에게는 평당 1만원 안팎의 돈이 손에 쥐어졌다. 그리고 지금 그 땅은 평당 300만원이 넘는다고 했다. 그 차익을 다시 돌려줄 수는 없겠지만 이제 한가지 선택은 해야 한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등산로를 개설하든 나물채취를 허가해주든지…. 오색사람들에겐 다른 선택의 길이 없어 보인다.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0-오색-오색에도-흔들바위가-있었네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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